잊혀진 기억속의 선생님
잊혀진 기억속의 선생님
지금도 12월이면 아득히 먼 날의 초등학교 5학년때가 가금씩은 아련하게 떠오른다.
아마도 지금으로부터 52년 전 겨울 방학을 앞 둔 어느날 이니
실로 반세기전의 기억이니 희미할 수 밖에 없다.
그당시 큰키에 연세가 많게 느껴졌던 6학년 담임 선생님께서
학년 수업을 조기에 마친 상태에서 오후 수업시간에는 역사 강의를하 셨는데
우리 5학년에서 서너명 인지 정확히 생각이 나지않는다.
6학년 교실에서 지금으로 말하면 청강생으로 수강을 하게 되었다.
지금도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것도 그당시 열정적으로 강의하신
선생님의 영향이 큰것으로 생각된다.
교실 맨 뒷자리에 않아 지금의 기억으로는 꽤나 진지하게 경청했던것같다.
이조 오백년의 역사에 대해서 지금도 어느 정도는 희미하게 나마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도 가끔 지인들과의 술자리 등에서는 나의 이야기 주제가 되도 한다.
모두가 야사를 중심으로 한것이지만 사실 역사 과목하고는
나의 평생 직업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중에 일부이지만 세종대왕 당시
명나라에서의 한시백일장 같은것으로 기억되는데.
조선국에서도 참가해야 함에 조정에서는 누구를 보낼것인가
논의를 한끝에
젊으면서도 문장에 능한
"집현전 학사 成三門[1418-1456]"을 보내기로 결정하여
성삼문은 세종대왕[1397 ~ 1450]과 대신들이 전송을 받으며
한양을 출발 오랜 시간에 걸쳐 육로로 평양등 압록강을 건너 멀고
먼 북경에 도착하게되었다.
시험장에 도착한 성삼문은 명나라 선비들과 함께 자리에 정좌하여
지필묵을 준비하자
높은 단상에 걸려있던 두루마리가 풀리면서 눈앞에는 "四喜"라고 쓴 詩題가 들어왔다.
시작을 알리는 징소리와 함께 "성삼문"은 두눈을 감고 시상을 떠올리려고 애를 썼으나
떠오르는 것은 한양을 출발 할때 세종대왕과 대신들이 잘하고 오라며
환송한 당시의 모습들만 연상 될뿐
한 자도 못적고 전전 긍긍하고 있을 뿐이었다.
시간은 흘러 일부 선비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시험지를
제출하고있는 분위기에 이르자
"성삼문"이 좌즉 앞을 보니 그때는 우산 같은 것으로
각자 가리고 있었는데 그사이로 남루한 옷차림의
선비가 쓴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東房無月夜 [동방무월야]
金榜掛名詩 [금방괘명시]
他鄕見故友 [ 타향견고우]
大旱逢甘雨 [대한봉감우]
한동안 아무런 생각이 없던 성삼문은 바로 이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 선비가 쓴 문장 앞에 두 자씩을 더해
華燭 東房無月夜 [화촉 동방무월야]
少年 金榜掛名詩 [소년 금방괘명시]
千里 他鄕見故友 [천리 타향견고우]
七年 大旱逢甘雨 [칠년 대한봉감우]
이렇게 써서 제출하였으며 그리고 장원을 하자 그 앞자리에 앉아있던
남루한 옷차림의 선비의 원망이 가득한 시선을 뒤로 느끼면서
명나라 황제의 환대를 받고...
귀국하여서는 세종대왕과 대신 백성들들로부터 환영 받은것으로
알려져 있다는 내용도
이제는 점점 잊혀져가는 기억중의 하나이겠지.
지금 생각하면 꽤나 많은 량의 역사 강의 였는데
희미 하나마 기억속에 남아 있음도 선생님의 열정의 덕분이리라.
그중에 일부 "성삼문의 "四喜"를 떠올려 본다
지금은 이세상에 계시지 않겠지만
그때의 선생님 생각을 해보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