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릉에 도착하니
진나라 당시의 복장을한 경비병들의 교대 의식을 진행중이어서 우리 일행은
관람후 진시황릉을 둘러보고
식당 귀비주점에서
20 종류의 만두로 중식으로 서안에서의 모든 일정이 끝나고
서안 함양국제 공항으로 이동 하면서 아쉬운 가운데 일정을 마감한다..
진시황릉은 세계최대규모의 묘로서 황제 [기원전 247 ~ 210년]가 즉위한때부터 37년에 걸쳐 조성되었다고 하며
둘레 25km정도의 능지하에는 화려한 궁전과 부장품이 있다는것을 자외선 조사로 밝혀졌다고....
그는 죽음에 대비해 50㎢에 달하는 무덤 부지와 그 속에 묻을 부장품들을 마련해두었다. 그 속에 든 보물들은 시황제의 사후
약 2,100년이 지나서야 빛을 보게 되었다. 1974년 3월 우물을 파던 농부들이 처음으로 지하에 묻힌 방을 발견했다.
뒷날 고고학자들은 이곳에서 6,000구가 넘는 실물 크기의 병사와 병마도용(陶俑)을 찾아냈다.
이들 도용은 모양이 동일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으로 보아 실물을 모델로 했으리라고 추측된다.
실제의 마차, 철제 농기구, 청동 및 가죽 재갈, 비단·아마·옥·뼈 등으로 만든 물건들이 출토되었다.
또 활·화살·창·칼과 같은 무기들과 13가지 성분을 합금한 주형(鑄型)도 출토되었는데,
이것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빛이 나고 날카롭다. 예전에는 광물성 안료로 밝게 칠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진흙 상들이
당시의 군대 규율에 따라 독특한 군사 대형으로 늘어서 있다. 선두에 궁수(弓手)와 석궁(石弓) 사수가 배치되어 있고
그 바깥에는 사수 및 보병과 전차병 무리가, 후미에는 갑옷을 착용한 호위병이 줄지어 있다. 부근에서 3개의 방이 더 발굴되었는데,
그중 한 방에는 1,400개가 넘는 도용이 들어 있었고 이것은 전차와 기병을 보충하기 위한 것으로 더 작게 만들어져 있었다.
또 하나의 방에는 아마도 진군(秦軍)의 정예 지휘부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는 68개의 상이 들어 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빈방이었다.
이 4개의 방, 이른바 시안 유물은 고고학자들의 발굴작업이 진행될 때부터 지붕으로 덮여 보호되었으며,
현장에 세워진 진용박물관(秦俑博物館)에서 특별히 관리하고 있다.
도기로 만들어져 매장된 호위병들은 무덤 바깥 벽으로부터 1.2㎞ 정도 떨어진 곳에서 전투태세를 한 채 동쪽을 향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진이 천하를 통일하기 이전에 동쪽에서 침입해온 강력한 적수로부터 시황제를 보호하는 형태인 것으로 짐작된다.
능 서쪽의 또다른 장소에서는 중국에서 이제까지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청동기들이 발견되었다. 이 청동기는
머릿부분을 금·은으로 장식한 4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인데, 차일을 드리운 채 각기 행정관들을 태우고 있었으며 크기는 실물의 반 정도이다.
또 하나의 부속 동굴에서는 말의 뼈로 가득 찬 지하 마구간, 장군들의 묘지, 70개의 개인 매장지, 그밖에 공예품들이 출토되었다.
시황제의 무덤 자체는 아직 발굴되지 않고 있으나 아마도 4면으로 된 피라미드 형태의 흙둔덕 바로 아래,
내벽 안에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피라미드형 흙둔덕은 원래는 낮고 숲이 우거진 산처럼 보이도록 조경된 것이다.
능 내부는 광대한 지하궁전으로, 각지에서 징발된 70만여 명의 일꾼들을 동원해 36년이 넘게 걸려 완성했다고 한다.
역사가 司馬遷(BC 145경~85경)은 이 유적지에서 발굴작업이 시작된 지 10년이 지난 뒤 고고학자들은
진시황릉에서 나머지 보물을 완전히 발굴해내려면 아마도 몇 세대가 더 소요되어야 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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